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대학교/의견 및 비판 (문단 편집) === 일제의 후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경성제국대학)]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서울대학교의 역사, rd1=서울대학교/역사)] --서울대가 하드웨어를 이어받은 경성제국대학은 [[제국대학]]인데, 이것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서울대를 현재도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배출한 온상으로 취급하고 있다. 일본에 의해 설립된 대학이 설립 모체라는 점은 서울대를 비판할 때 흔히 사용되는 레퍼토리 중 하나이다.-- 학교 차원에서도 --같잖은-- 낭설에 은근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다. [[일본 제국]]과 엮이는 게 어지간히 신경쓰였는지 서울대학교의 공식 발표는 1946년 폐교된 경성대학 등 10개의 학교를 바탕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만 그 통합된 학교 중 '''[[대학]]'''은 [[경성대학]]이 유일했고, 나머지 9개 학교[* 경성경제전문학교, 경성치과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여자사범학교, 수원농림전문학교.]는 [[구제전문학교|전문학교]]나 [[구제중학교|중학교]][* 일제 강점기의 학제에서 초등교원을 양성하는 사범학교는 당시 중학교 급이었다.]를 전신으로 한다. 공식 입장이야 어쨌든 사실은 엄연한 사실로,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은 [[8.15 광복]] 뒤에는 미 군정청에 의하여 폐교된 뒤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 당시 9개의 전문학교들도 학부의 일부분으로 통합되어 격상되었다.]에 따라 '''[[서울대학교]]'''로 이관되었고, 현재 서울대학교의 [[서울대학교/학부/인문대학|인문대학]], [[서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사회과학대학]], [[서울대학교/학부/자연과학대학|자연과학대학]], [[서울대학교/학부#간호대학|간호대학]], [[서울대학교/학부/공과대학|공과대학]], [[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법과대학]],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과대학]]의 모체가 되었다. 사실 경성제국대학을 잇는 경성대학 자체는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 및 공과대학으로 '''해체'''되었다. 경성대학을 비롯한 서울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구제전문학교/[[서울대학교/학부/사범대학|사범학교]] 졸업생들은 서울대를 모교로 생각하고 있어서, 학교 내의 각종 도서관에서 경성대학 졸업생들이 기증한 책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특히 일본어로 씌여있고 누렇게 뜬 책들은 거의 100%다. 기존 경성대학 자리에서 [[서울대학교/캠퍼스|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후에도 경성대학과의 물적 연속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가령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의 방대한 [[https://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89325|'''구간서고''']] 역시 경성대학의 장서가 그대로 이관된 것이고, [[서울대학교/캠퍼스|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는 옛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위치하고 있던 [[종로구]] [[연건동]] 대학로에 아직까지도 자리잡고 있다. 물론 학자에 따라서는 설립 주체와 설립 목적이 바뀌었다는 점, 경성제국대학 이외에 여러 구제전문학교가 합쳐져 만들어진 학교라는 점[* 단순히 경성제국대학 역사만 따질 경우 다른 단과대학들의 역사를 '''흑역사'''화 하는 것이 된다.]을 들어 경성제대 계승론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하나의 학교라는 관점에서 경성제국대학이 국립 서울대학교에 남긴 유산은 많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직원은 거의 일본인이었는데, 해방 당시 조선인 교수는 1명[* 해방 직전인 7월 17일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김종원(1900)|김종원]]이 교수로 임명됨.]이었고, 역대 통틀어도 4명에 불과하며, 이들의 재직 기간을 다 합쳐도 2년[* 13개월, 4개월, 1개월, 3일]이 채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교수, 연구 인력의 연속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경성제국대학의 유산은 대학 캠퍼스, 캠퍼스 건물, 도서, 여러 기자재 등을 비롯한 물적 자산에 불과할지 모른다. 다만 대학이 아닌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 국가 우위의 대학교육, 관료 지향적 학생들의 양산 등의 현상이 식민지 조선의 교육에 연원을 두고 있고, 그 중심에 경성제국대학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경성제국대학의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정준영, '경성제국대학과 식민지 헤게모니' 참조.] 결코 적지 않다는 증거는 이른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의 존재와 인문대학 음악사학과의 부재에서 확인 가능하다. 학부과정에 주요 기초학문인 음악사학과가 없고 철학의 분과학문에 불과한 미학 관련 학과는 있는 전 세계 주요 대학은, 그 전신이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제국대학]]이었던 곳 정도 외에 사실상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경성대학에서 서울대학교로 이관되며 [[엘리트주의]] 의식의 이동도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명백히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경성제국대학]]의 조선인 학생들 중 법문학부 문학과[* 舊 문학과, 사학과, 철학과]와 이공학부 이학계열(물리학과, 화학과)는 타 전문학교와 섞임 없이 순수하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이 되면서 경성제대의 인적 구성이 명백하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제1류 법학전공, 제2류 정치학전공, 제3류 경제학전공] 학생들은 [[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s-3.3|경성법학전문학교]]와 섞이는 것은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격렬히 반대하면서 [[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s-3.4|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심으로 설립된 서울대 법과대학]] 소속으로의 학적 변경을 거부하고, 경성제국대학의 정통 계승이라 여겨지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소속의 정치학과로 끝까지 남았다. 이 때문에 서울대학교에는 정치학과가 [[법과대학]]이 아니라 [[문리과대학]]에 소속되어 있었고, 1950년대에는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서 오히려 법과대학보다도 더 많은 [[사법고시]] 합격자가 쏟아져 나왔다. 다른 [[전문학교]]와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의 후신으로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은 서울대 중의 진짜 서울대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출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육십년사. [[http://sangdae.com/s5/s5_1.php|서울상대 총동창회 회보인 향상의탑]] 제165호(2018.12)에 실린 [[http://www.sangdae.com/webzine/2018-12-165/EBook.htm|정기준 명예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1943년 10월 경성제대 입학생인 조영휘, 서우택, 송겸호, 최형규 등 4명이 경성경제전문학교의 후신으로만 여겨지는 서울대 상과대학의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하였으며 1945년 4월 경성제대 최후 입학기수인 조철 역시 서울상대 제2회 졸업생으로 기록되어있다고 한다. 해방 이후 국대안 시행 이전까지 경성대학으로 입학한 학생들 중에서도 17명이 상과대학 소속으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다고 한다.] 한편으로, 2010년 3월 말에 서울대 총동창회에서 1895년으로 개교년도를 바꾸는 것이 어떻냐고 제의한 바 있다. 또한 의대는 [[국립]]병원이라는 점을 내세워 [[광혜원]]이 세워진 1885년까지 올려잡는 경우가 있다.[* 이로 인해 현재 광혜원-세브란스병원-세브란스의대로 광혜원의 전통을 나누어 계승한 연세대학교와 정통성 분쟁을 벌이고 있다.] 2010년 10월 10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0/10/2010101000024.html?Dep1=news&Dep2=headline1&Dep3=h1_12|기사]]를 보면 서울대 최고의결기구인 평의원회는 1895년 한성사범학교[* [[사범대학]]의 전신이다.] 와 법관양성소가 개설된 이후부터 경성제대 시절까지를 포함해서 묘사하는 역사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50년의 역사를 버리고 싶지 않은 모양. 다만, 서울대학교의 "개교"는 여전히 1946년이고 1895년은 "근대적인 교육이 시작됐다는 의미"에서 ''''개학(開學)연도''''로 한다'고 결정했다고 한다.[* 대한제국 말기와 국권 병탄 직후에 '대학(大學)'이나 '대학부(大學部)'라는 명칭을 가진 고등교육기관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대학으로 볼 수 없다. 이 명칭을 가졌던 현재의 일부 대학교에서는 조선총독부가 대학과 대학부라는 명칭을 가진 학교를 인가한 사실을 들어, 자신들이 최초의 대학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당시 총독부의 숭실협성대학, 경신학교 대학부, 이화학당 대학부의 인가 내용을 보면, [[전문학교]]급 인가였으며, 대한제국의 인가사항을 연장하여 임시로 인가한 것에 불과했고 정식으로 전문학교령이 제정된 이후에는 모두 인가를 상실했다. 이 시기 일본의 교육법제상 제국대학 이외의 대학은 설립ㆍ운영할 수가 없어 1918년에 [[대학령]]이 제정되기까지는 일본에서도 제국대학 이외에는 대학의 설립과 운영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총독부가 상기 학교의 대학이나 대학부라는 명칭을 대학으로 인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법제상으로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1926년 [[경성제국대학]] 본과의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한반도에서 대학교육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2021년 6월 21일부터 [[서울대학교/사건사고]] 항목에서 알 수 있듯 서울대의 높은 직위의 인사들이 [[재벌]]을 벤치마킹해 [[민영화]]적 방향으로 무비판적으로 개편시키려다 동일한 [[신자유주의]]적 문제점을 공유하게 되어 청소 노동자에게 갑질을 해놓고 책임전가를 하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잠시동안 네티즌들 사이에서 경성제국대학이 멸칭으로 쓰이기도 했다.갑질 사건을 기점으로 이전 멸칭이 단순히 서울대가 친일화되지 않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감시하는 것이었다면, 이후 멸칭은 서울대가 비정규직 홀대에 신경쓰지 않고 신자유주의와 재벌의 부정적 문제점을 벤치마킹하기 급급해 할 경우 서울대를 자국의 가장 우수한 인재가 모인 대학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자국 대학으로조차 취급하지 않고 일제의 잔재로만 취급하겠다는 의미가 되었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